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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탈리아 국민오페라 -라 트라비아타- 2013-11-12 708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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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탈리아 오페라 사상 최고의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. 선이 굵은 남성적인 작풍과 애국심과 인본주의로 대표되는 뚜렷한 주제의식으로 지금까지도 전세계 수많은 오페라 팬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거장 베르디는 -리골레토-, -아이다-, -오텔로- 등 불후의 명작들을 쏟아냈지만,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도 -라 트라비아타- 만큼 대중들에게 널리 사랑받는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. 이렇듯 오페라 좋아하는 사람치고 -라 트라비아타- 모르는 사람 없다지만,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의 -라 트라비아타-에 대한 애정과 집착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면이 있다.

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소프라노로 군림했던 그리스계 미국인 마리아 칼라스는 1950년대 초엽부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오페라 극장인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-라 트라비아타-의 주인공 비올레타 발레리를 부를 수 있기를 바랬지만 번번히 쓰라린 좌절을 맛보아야 했는데, 그 이유는 라 스칼라 극장의 총감독인 안토니오 기링겔리의 방해공작 때문이었다. 광신적인 국수주의자 기링겔리에게 있어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표작 -라 트라비아타-의 여주인공역을 이탈리아 출신이 아닌 그리스계 칼라스에게 맡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, 그는 칼라스의 공연을 저지하기 위해 협박과 회유도 서슴치 않았다. 양측의 지리한 공방 끝에 결국 여론몰이로 기링겔리를 압박한 칼라스가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의 지휘로 저 유명한 1955년의 공연을 성공리에 끝마치면서 이 길고 긴 싸움은 기링겔리의 패배로 종지부를 찍게된다.

칼라스가 사라진 후 라 스칼라가 다시 -라 트라비아타-의 성공적인 공연을 갖기 까지는 거의 4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는데, 1960년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당시 30대의 신예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를 비올레타로 전격 캐스팅하여 시도한 -라 트라비아타- 부활 계획은 참담한 실패로 끝난채 카라얀의 캐스팅에 반발한 거물 소프라노 레나타 스코토의 라 스칼라 극장 고소 사건이라는 불미스런 기억만을 남기고 말았다. 아바도의 뒤를 이어 라 스칼라 극장의 음악감독에 취임한 리카르도 무티는 취임일성으로 베르디 오페라의 전작품을 새롭게 제작하여 공연함과 동시에 특별히 -라 트라비아타-의 부활을 힘주어 강조했는데, 결국 1992년에 젊은 가수들을 대거 기용한 공연이 청중들의 폭풍과 같은 호응 속에 대성공으로 끝남으로써 1955년 이후 자취를 감추었던 라 스칼라 극장의 -라 트라비아타-는 40여년만에 극적인 생환의 감격을 누렸고 청중들은 진정한 이탈리아 오페라의 부활을 소려높여 외쳤으니, 이처럼 -라 트라비아타-는 단순히 잘 만들어진 낭만주의 오페라일뿐만 아니라 실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'국민 오페라'로 불러도 모자람이 없을 듯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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